여름이 왔다는 걸 달력보다 먼저 알려 주는 건, 마트 입구에 쌓인 초록 줄무늬 더미다. 묵직한 수박 한 통을 끙끙대며 안고 오는 길, 벌써 마음 한구석이 시원해진다. 별것 아닌데, 수박에는 이상하게 여름 한 철의 기분이 통째로 담겨 있다.
고르는 일부터가 여름의 의식
수박을 고를 때 사람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통통 두드려 본다.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나면 잘 익었다는 옛 어른들의 지혜다. 사실 그 소리만으로 단맛을 정확히 맞히긴 어렵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한 통을 신중하게 고르는 그 잠깐 자체가 여름을 맞이하는 작은 의식 같다는 것이다.
집에 와 냉장고에 넣어 두고 차가워지길 기다리는 시간도 묘하게 설렌다. 빨리 먹고 싶은 마음과 차가워야 제맛이라는 인내 사이에서, 우리는 잠시 어린아이가 된다.
쪼개는 순간의 소리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칼을 대는 순간이다. 잘 익은 수박은 칼이 반쯤 들어가자마자 '쩍' 하고 제 무게로 갈라진다. 그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붉은 속살이 드러나면, 보고만 있어도 더위가 한풀 꺾이는 기분이다.
여름의 행복은 거창하지 않다. 잘 익은 수박이 갈라지는 그 소리 한 번이면 충분할 때가 있다.
가족이 둘러앉아 한 조각씩 나눠 드는 풍경도 정겹다. 누구는 까만 씨를 야무지게 골라내고, 누구는 그냥 삼키고, 누구는 끝까지 흰 부분까지 긁어 먹는다. 같은 수박을 먹는데도 제각각인 그 모습이, 사실은 그 집의 여름 풍경이다.
사소해서 더 오래 남는 기억
신기하게도 오래 기억에 남는 여름은 대단한 여행지가 아니라 이런 장면들이다. 평상에 앉아 먹던 수박, 한 손에 든 채 흘러내리는 국물에 웃던 일, "씨 뱉기 시합하자"며 까불던 어린 날.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감각이 계절의 기억을 만든다.
어른이 되면 이런 순간을 자꾸 미루게 된다. 바쁘다는 이유로, 귀찮다는 이유로. 하지만 수박 한 통을 사 와 쪼개는 데 드는 수고는 그리 크지 않다. 그 작은 수고 끝에 오는 시원함과 단맛은, 어떤 비싼 디저트도 흉내 내기 어려운 종류의 만족이다.
올여름엔 한 통쯤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맘때,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 전에 수박 한 통을 안고 와 보는 건 어떨까. 차게 식혀, 좋아하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한 조각씩 나누는 것. 그 평범한 장면 하나가 올여름의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여름은 짧고, 행복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 오늘 저녁, 냉장고 문을 열며 생각한다. 수박, 사 올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