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봐 온 봉지를 냉장고에 그대로 밀어 넣은 지 나흘째. 문을 열자 안쪽 어딘가에서 물러버린 애호박이 굴러 나오고, 채소칸 바닥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기가 고여 있다. 분명 아껴 쓴다고 넣어둔 것인데, 결국 반은 쓰레기통으로 간다. 냉장고는 음식을 '오래' 보관하는 기계가 아니라, 넣는 방법에 따라 수명이 크게 갈리는 공간이다. 오늘은 버리는 음식과 전기요금을 함께 줄이는, 냉장고 정리와 식재료 보관의 기본기를 정리해 본다.
냉장고에 넣으면 오히려 빨리 상하는 것들
의외로 많은 식재료가 냉장고에서 더 빨리 망가진다. 대표적인 것이 감자, 양파, 토마토다.
감자는 낮은 온도에서 녹말이 당으로 바뀌는 '저온당화'가 일어난다. 대략 7℃ 아래에 두면 단맛이 어정쩡하게 돌고 조리했을 때 색이 거뭇하게 변한다. 냉장고 대신 신문지에 싸서 햇빛이 닿지 않는 서늘한 곳에 두면 한두 달은 거뜬하다. 이때 사과를 한 알 함께 넣어두면 감자에서 싹이 나는 것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된다.
양파도 통째로 있을 때는 실온이 정답이다. 습기가 곰팡이의 원인이 되므로, 망이나 구멍 뚫린 바구니에 담아 공기가 사방으로 통하는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둔다. 다만 껍질을 벗기거나 썰어둔 양파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때는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 보관하고 며칠 안에 쓰는 편이 좋다.
토마토는 냉장고의 찬 기운을 만나면 특유의 향과 단맛이 옅어진다. 한 연구에서는 약 4℃에 보관한 토마토에서 향미 물질을 만드는 유전자의 발현이 줄었다고 한다. 직사광선을 피해 실온에 두고 며칠 안에 먹는 편이 가장 맛있다.
냉장은 '무조건 오래'가 아니라, 식재료마다 다른 최적의 온도를 맞춰주는 일이다.
냉장고 칸마다 온도가 다르다
같은 냉장실이라도 위치에 따라 온도가 제법 차이가 난다. 이 차이를 알고 자리를 정해주는 것만으로도 식재료가 훨씬 오래간다.
문 쪽은 여닫을 때마다 바깥 공기가 드나들어 가장 따뜻하고 온도 변화도 크다. 그래서 문 칸에는 온도에 덜 민감한 물, 음료, 각종 소스와 잼 정도가 어울린다. 흔히 문 안쪽에 두는 계란은 사실 온도가 오르내리기 쉬운 자리여서, 신선도를 오래 지키려면 안쪽 선반에 두는 편이 낫다.
냉장실에서 가장 차가운 곳은 보통 맨 아래 칸과 안쪽이다. 금방 상하기 쉬운 두부, 어묵, 개봉한 유제품, 그리고 하루 이틀 안에 조리할 고기·생선은 이 안쪽 자리로 보낸다. 반대로 자주 꺼내 먹는 반찬이나 남은 음식은 눈높이 선반에 두면 뒤로 밀려나 잊히는 일이 줄어든다.
채소칸은 습도가 조금 높게 유지되도록 설계돼 있어 잎채소와 뿌리채소에 알맞다. 다만 앞서 말한 감자·양파처럼 실온이 나은 것까지 억지로 채워 넣을 필요는 없다.
채소와 나물, 세워서 담고 물기를 다스린다
잎채소가 하루 만에 시드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 눌림과 마름이다. 대파, 시금치, 미나리처럼 길쭉한 채소는 원래 자라던 대로 세워서 보관하면 눌리지 않아 훨씬 오래 싱싱하다. 우유팩이나 페트병을 잘라 만든 통에 세워 담고 채소칸에 넣으면 자리도 깔끔하게 잡힌다.
물기는 양날의 검이다. 표면에 물이 흥건하면 물러버리지만, 완전히 마르면 숨이 죽는다. 씻은 채소는 물기를 충분히 턴 뒤 키친타월로 감싸 밀폐용기나 지퍼백에 담는다. 키친타월이 남은 물기를 머금어 습도를 알맞게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상추나 깻잎은 통 바닥에 마른 키친타월을 한 장 깔아두면 무르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다.
버섯은 물에 특히 약하다. 씻지 않은 채로 종이봉투나 키친타월에 싸서 두고, 쓰기 직전에 손질하는 것이 좋다. 비닐봉지에 밀봉해두면 갇힌 습기 때문에 금세 미끈해진다.
남은 음식과 냉동, '언제 넣었는지'가 핵심
애써 정리해도 정작 무엇이 언제 들어갔는지 모르면 결국 안쪽에서 잊혀 상한다. 남은 반찬이나 국은 얕고 넓은 밀폐용기에 옮겨 담아 빨리 식힌 뒤 냉장고에 넣는다. 뜨거운 채로 바로 넣으면 주변 온도가 올라 다른 음식까지 위험해지고 냉장고도 더 힘겹게 돌아간다.
가장 쉬운 습관 하나는 날짜 적기다. 마스킹테이프나 라벨에 넣은 날짜를 적어 붙여두면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지'가 눈에 보인다. 냉동실에 넣는 고기나 국거리도 마찬가지다. 한 번 먹을 양씩 나눠 납작하게 펴서 얼리면 빨리 얼고 빨리 녹으며, 겹쳐 세워두면 공간도 절약된다.
한 가지 원칙을 더하자면 '먼저 산 것을 앞으로'다. 새로 산 식재료는 안쪽에, 원래 있던 것은 앞으로 당겨두는 것만으로도 유통기한을 놓치는 일이 크게 줄어든다. 편의점이 진열대를 채우는 방식과 똑같은 이치다.
냉장고를 비우는 일이 곧 절약이다
냉장고는 꽉 채울수록 좋은 물건이 아니다. 냉장실은 70~80% 정도만 채워 찬 공기가 고루 돌게 하는 편이 식재료 보관에도, 전기요금에도 유리하다. 반대로 냉동실은 어느 정도 채워두면 서로 냉기를 머금어 효율이 올라간다. 냉장실은 여유 있게, 냉동실은 알차게 — 이 정도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일주일에 한 번, 장을 보기 전에 냉장고를 한 바퀴 훑어보는 습관을 들여보자. 남은 재료로 먼저 한 끼를 해결하고 부족한 것만 사 오면, 사놓고 버리는 음식이 줄고 지갑도 가벼워진다. 결국 냉장고 정리는 대단한 기술이 아니라, 넣기 전에 잠깐 생각하는 몇 초의 문제다.
오늘 저녁, 냉장고 문을 열면 안쪽 구석부터 한 번 살펴보시길. 잊고 있던 재료 하나를 살려내는 것, 그 작은 성취가 다음 한 끼를 조금 더 든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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