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프린터를 3개월 만에 꺼낸 날의 풍경은 대체로 비슷하다. 전원은 들어오는데 종이는 백지로 나오고, 노즐 청소를 두어 번 돌리고 나면 잉크 잔량 표시가 뚝 떨어져 있다. 결국 편의점으로 뛰어가 장당 몇백 원을 내고 출력한다. 본체는 분명 싸게 샀는데, 그 프린터로 뽑은 종이 한 장의 실제 원가는 편의점보다 비싸진 지 오래다.
프린터는 사는 순간 끝나는 물건이 아니라 소모품을 계속 사게 되는 물건이다. 그래서 고를 때 봐야 할 숫자도 본체 가격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먼저 셀 것은 가격이 아니라 '연간 장수'
가전을 고르는 기준은 보통 스펙이지만, 프린터만큼은 내 사용 습관이 먼저다. 지난 1년을 떠올리며 대략 세어보자. 아이 학습지와 학교 안내문, 계약서와 각종 신청서, 여행 일정표와 티켓. 이 정도만 쓰는 집은 대개 연 100~300장 안쪽이다. 재택근무로 자료를 자주 뽑거나 자영업 서류가 많으면 연 1,000장을 쉽게 넘긴다.
기준선은 단순하다. 연 300장 아래면 '가끔 쓰는 집', 연 1,000장 위면 '자주 쓰는 집'이다. 그 사이라면 무엇을 뽑는지(문서냐 사진이냐)가 결정을 가른다.
프린터의 진짜 가격표는 상자에 붙어 있지 않다. 1년 뒤 서랍에 쌓인 잉크 영수증에 적혀 있다.
방식별로 장당 얼마쯤 드나
작성 시점 기준으로 시중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대략적인 범위는 이렇다. 모델·용지·인쇄 밀도에 따라 편차가 크므로 절대값이 아니라 자릿수 감각으로 보면 된다.
| 방식 | 본체 대략 | 장당 비용 감각 | 잘 맞는 집 |
|---|---|---|---|
| 카트리지 잉크젯 | 가장 저렴 | 흑백 기준 100원 안팎 | 아주 가끔, 컬러 필요 |
| 무한잉크(정품 충전형) | 중간~높음 | 10원대 이하까지 | 자주, 컬러·사진 병행 |
| 흑백 레이저 | 중간 | 20~30원대 | 문서 위주, 속도 중시 |
숫자를 곱해보면 감이 온다. 연 1,000장을 뽑는 집이 장당 100원짜리를 쓰면 소모품에만 10만 원이 나간다. 같은 양을 장당 15원으로 뽑으면 1만 5천 원이다. 본체 차액 10만 원은 1~2년이면 회수된다. 반대로 연 100장만 뽑는 집이라면 그 차액을 되찾는 데 10년이 걸린다. 싼 본체가 정답인 경우도 분명히 있다는 뜻이다.
'가끔 쓰는 집'의 진짜 적은 가격이 아니라 마름
잉크젯의 약점은 잉크값보다 헤드 막힘이다. 액체 잉크가 미세한 노즐을 통과하는 구조라, 몇 주에서 몇 달을 쉬면 굳어서 막힌다. 청소 기능이 있지만 청소할 때마다 잉크가 소모되고, 심하면 헤드 교체 비용이 본체값에 육박한다.
토너 가루를 열로 종이에 눌러 붙이는 레이저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다. 두 달 만에 켜도 첫 장부터 멀쩡하게 나온다. 그래서 "거의 안 쓰는데 급할 때만 필요하다"는 집에는 오히려 흑백 레이저가 마음 편한 선택이 되는 역설이 생긴다. 사진 인화가 목적이 아니라면, 집에서 뽑는 종이의 90%는 어차피 검은 글씨다.
복합기라면 스캔·양면·무선을 이 순서로 본다
요즘 가정용은 대부분 복합기다. 인쇄 성능만큼 자주 쓰게 되는 게 나머지 기능이라 이쪽을 놓치면 후회한다.
- 자동급지(ADF): 여러 장짜리 서류를 한 번에 스캔한다. 등본·계약서를 자주 다룬다면 체감 차이가 가장 크다.
- 자동 양면 인쇄: 종이값이 절반이 되고, 뒤집는 수고가 사라진다.
- 무선·모바일 출력: 케이블 없이 폰에서 바로 보내는 기능. 사실상 기본이지만 저가형에는 빠진 모델도 있다.
- 스캔 저장 경로: 클라우드나 이메일로 바로 보내지는지. 스캔해서 PDF로 제출할 일이 많다면 중요하다.
반대로 자주 광고되는 초고속 인쇄 속도나 최대 해상도는, 집에서 하루 몇 장 뽑는 환경에서는 체감이 거의 없다.
사기 전 3분, 이것만 검색해보자
모델을 좁혔다면 마지막으로 세 가지를 확인한다. 첫째, 그 모델의 정품 소모품 실제 판매가. 본체는 특가인데 잉크가 유독 비싼 조합이 있다. 둘째, 호환 소모품 사용 시 보증 조건. 셋째, 무한잉크라면 정품 충전 잉크 단가와 예상 출력 매수. 이 세 숫자를 곱하고 나누면, 광고 문구보다 훨씬 정확한 답이 나온다.
가격과 사양은 시기와 판매처에 따라 달라지므로, 구매 전 공식 판매처 정보를 다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정리하면
- 연 300장 미만·급할 때만 → 흑백 레이저 또는 저가 잉크젯(단, 마름 감수)
- 연 300~1,000장·문서 위주 → 흑백 레이저 복합기
- 연 1,000장 이상 또는 컬러·사진 병행 → 무한잉크 복합기
프린터는 화려한 물건이 아니다. 아이 준비물 안내문을 새벽에 급히 뽑아야 할 때, 계약서 한 장이 당장 필요할 때 조용히 제 몫을 하면 그만이다. 그 조용한 순간에 백지가 나오지 않도록, 오늘은 상자 앞면 대신 뒷면의 숫자를 한 번 들여다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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