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개학 직전, 아이 학습지를 뽑으려고 2년 만에 프린터 전원을 켰다고 해봅시다. 예열음은 요란한데 정작 나오는 건 줄무늬가 죽죽 그어진 종이 몇 장. 헤드 청소를 세 번 돌리고 나니 잉크는 절반이 사라졌고, 결국 그날 밤 인터넷으로 새 잉크 카트리지를 주문합니다. 가격을 보고 잠깐 멈칫하죠. 본체보다 잉크가 더 비싼 이 이상한 계산법 앞에서요.
프린터는 참 애매한 물건입니다. 매일 쓰지는 않는데 없으면 꼭 아쉽고, 살 때 가격보다 쓰는 동안 드는 돈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요즘 잘 나가는 모델"을 검색하는 것보다, 내가 1년에 몇 장을, 무슨 색으로, 얼마나 몰아서 뽑는지를 먼저 계산하는 쪽이 훨씬 실속 있습니다. 오늘은 그 계산법을 정리해 봅니다. (가격·유지비는 모두 작성 시점 기준의 대략적인 시장 감각이며, 실제 구매 시점의 조건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프린터 고민은 사실 세 갈래로 갈린다
가정·소규모 사무실에서 선택지는 크게 셋입니다. 카트리지형 잉크젯, 무한잉크(정품 무한공급) 잉크젯, 그리고 레이저입니다. 복합기냐 단일 프린터냐는 그 다음 문제예요.
카트리지형 잉크젯은 본체가 가장 쌉니다. 소형 모델은 몇만 원대에서 시작하죠. 대신 잉크값이 비싸서 장당 인쇄 비용은 100원 안팎까지 올라갑니다. 100장 뽑으면 종이값 빼고도 만 원 가까이 나가는 셈입니다.
무한잉크는 본체에 잉크통이 붙어 있고 병으로 리필합니다. 본체값은 더 나가지만 장당 비용이 10원 이하로 뚝 떨어져요. 레이저는 가루 토너를 열로 붙이는 방식이라 문서 인쇄가 빠르고 번지지 않으며, 토너 하나로 수천 장을 찍습니다.
프린터의 진짜 가격표는 본체 가격표가 아니라, 3년 치 잉크 영수증을 다 더한 숫자입니다.
유지비, 숫자로 한번 세워보기
가상의 세 가정을 놓고 3년을 굴려 봅시다. 종이값은 빼고 잉크·토너만 셈합니다.
| 사용 유형 | 연간 인쇄량 | 카트리지 잉크젯 | 무한잉크 | 흑백 레이저 |
|---|---|---|---|---|
| 가끔 문서만 | 100장 | 약 1만 원 | 약 1천 원 | 약 1만 원(토너 1개로 충분) |
| 아이 학습지·컬러 많음 | 1,500장 | 약 15만 원 | 약 1만5천 원 | 컬러는 부적합 |
| 재택 문서 위주 | 1,000장 | 약 10만 원 | 약 1만 원 | 약 3만 원 |
숫자가 말해주는 건 단순합니다. 연간 수백 장 이상, 특히 컬러를 뽑는다면 무한잉크의 본체 웃돈은 1~2년 안에 회수됩니다. 반대로 1년에 100장도 안 뽑는 집에서 무한잉크를 사면, 아낀 잉크값보다 본체 웃돈이 더 큽니다.
여기에 잘 안 보이는 비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잉크젯은 오래 쉬면 노즐이 마르고, 그걸 뚫느라 잉크를 태웁니다. 몇 달씩 방치할 계획이라면 그 자체가 유지비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습니다.
상황별로 답이 갈리는 지점
월 몇 장, 그것도 문서뿐인 집. 흑백 레이저가 가장 마음 편합니다. 헤드 막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 반년 만에 켜도 첫 장부터 깔끔하게 나옵니다. "필요할 때 확실히 작동하는" 가치가 큰 유형이죠.
아이 학습지, 컬러 자료가 많은 집. 무한잉크 복합기가 사실상 정답에 가깝습니다. 컬러를 마음 놓고 뽑을 수 있다는 게 생각보다 삶의 질을 바꿉니다. 잉크가 아까워서 흑백으로 뽑던 습관이 사라지니까요.
사진을 인화 수준으로 뽑고 싶은 사람. 이건 별도 종족입니다. 6색 이상 안료·염료 잉크를 쓰는 사진 특화 잉크젯이 필요하고, 유지비는 애초에 계산에서 밀어두는 영역입니다. 다만 1년에 몇십 장 뽑을 거라면 온라인 인화 서비스가 화질·비용 모두 낫습니다.
스캔·복사가 진짜 필요한가. 요즘은 스마트폰 스캔 앱 화질이 좋아서, 관공서 제출용 정도는 폰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여러 장을 자주 스캔하거나 자동급지(ADF)가 필요하다면 복합기가 시간을 크게 아껴줍니다. 필요 없는데 복합기를 사면 자리만 차지합니다.
스펙표에서 실제로 봐야 할 항목
- ppm(분당 매수): 가정용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20장짜리 문서에서 10ppm과 20ppm의 차이는 1분입니다.
- 양면 인쇄(듀플렉스): 자동 양면이 되면 종이가 반으로 줄고, 손도 덜 갑니다. 있으면 확실히 체감되는 기능.
- 무선·모바일 인쇄: 이제는 거의 기본이지만, 공유기 환경에서 잘 붙는지, 앱이 쓸 만한지는 후기를 봐야 압니다.
- 토너·잉크의 단종 위험: 너무 마이너한 모델은 몇 년 뒤 소모품 구하기가 번거로워집니다. 국내에서 소모품이 흔하게 유통되는 제품군이 안전합니다.
- 정품 무한 여부: 개조 무한잉크는 저렴하지만 보증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조사가 처음부터 잉크통을 붙여 파는 정품 무한 모델을 권합니다.
사고 나서 후회를 줄이는 습관 두 가지
첫째, 한 달에 한 번은 컬러 한 장이라도 뽑기. 잉크젯을 산 집이라면 이 습관 하나가 헤드 막힘 수리비를 막아줍니다. 달력에 넣어두면 좋습니다.
둘째, 소모품 모델명을 미리 적어두기. 잉크가 떨어진 새벽에 검색하면 급한 마음에 비싼 걸 사게 됩니다. 본체를 개봉한 날 메모장에 토너·잉크 품번을 적어두면, 다음엔 3초 만에 재주문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며
프린터 선택은 결국 세 문장으로 줄어듭니다. 가끔 흑백 문서만 → 흑백 레이저, 컬러를 자주 많이 → 정품 무한잉크 복합기, 1년에 몇십 장도 안 뽑음 → 애초에 편의점·출력소가 더 쌉니다. 마지막 선택지를 부끄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집에 들이는 물건 중에는 "많이 쓸수록 본전을 뽑는 것"과 "안 쓰면 조용히 손해가 쌓이는 것"이 있는데, 프린터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화려한 스펙보다 내 인쇄 습관을 먼저 들여다보세요. 그 계산만 정확하면, 어떤 모델을 골라도 크게 후회할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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