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퇴근 준비를 하던 지수 씨에게 옆자리 동료가 다가옵니다. "주말에 잠깐만 이 자료 좀 봐줄 수 있어요?" 이미 이번 주에만 세 번째 부탁입니다. 마음속에서는 '이번엔 좀 곤란한데'라는 소리가 분명히 들리는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언제나처럼 "아, 네… 볼게요"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수 씨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왜 매번 거절...
국어사전을 켜 두고도 매번 손이 멈추는 순간이 있다. 회사 단체방에 공지를 올리려다 "오늘 회의는 3시 부터입니다"라고 쓰고는, '3시 부터'가 맞나 '3시부터'가 맞나 한참을 들여다본 경험. 카톡 하나 보내는 데도 문득 자신이 없어지는 그 기분을, 아마 누구나 안다. 맞춤법은 시험 문제가 아니다. 다만 글에는 말투가 담기고, 정확한 표기는 읽는 사람에게 ...
새벽녘 빗소리에 잠이 깼다. 창을 때리는 소리가 제법 굵어진 걸 보니, 장마가 시작된 모양이다. 며칠째 흐린 하늘과 눅눅한 공기, 마르지 않는 빨래에 마음 한구석이 축축해지는 계절. 그런데 가만히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 계절이 꼭 미워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멈춰도 되는 시간 장마는 어딘가 강제로 우리를 멈춰 세운다. 우산 없이는 나설 수 없고...
밤 열한 시, 더위가 한풀 꺾인 시간에 베란다 창을 열면 낮과는 다른 공기가 들어온다. 낮의 그 끈적한 열기 대신, 어딘가 식은 듯 부드러운 바람이 분다. 여름밤은 그렇게, 하루의 끝에서야 비로소 숨통을 틔워준다. 낮이 너무 길어서 여름의 낮은 길다. 일곱 시가 넘어도 하늘은 환하고, 그래서 하루가 좀처럼 끝나지 않는 기분이 든다. 할 일은 다 했는데도 어...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마음이 두 갈래로 갈립니다. 어쩐지 차분해지는 한편, 빨래도 못 널고 신발도 젖을 생각에 살짝 가라앉기도 하죠.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비라면, 조금 다르게 맞이해 보기로 했습니다. 빗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삼기 비 오는 날의 가장 큰 선물은 소리입니다. 평소엔 시끄럽던 도시의 소음이 빗소리에 묻혀 한결 부드러워집니다. 일부러 ...
유월의 저녁은 묘하게 길어집니다. 일곱 시가 넘어도 하늘 한구석에 옅은 빛이 남아 있어서, 퇴근하고 집에 와도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며칠 전 그 빛에 이끌려 별생각 없이 동네를 한 바퀴 걸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냥 걸었을 뿐인데, 오랜만에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 평범한 산책에서 ...